아트워크 좋아요 [직사각]건초 마차 존 컨스터블 신고 다운로드 : 5,000원 Material : Mixed Media 작품이미지의 도용 및 무단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구매유형을 선택하세요. 구매유형 선택 다운로드 Total0원 장바구니 담기 아트워크 정보 작가 정보 [직사각]건초 마차 존 컨스터블 작품정보 판매 유형 유료 작품 유형 이미지 가격 다운로드 5,000원 작품 사이즈 130.5×185.5 재료 캔버스, Oil paint 작품 설명 1 모든 이들의 마음 속에 깃든 고향의 풍경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1776-1837)의 [건초마차]가 바로 그런 풍경이다. 컨스터블의 풍경화는 유달리 전원의 땅을 사랑하는 영국인들 뿐 아니라 누구라도 이상적인 고향을 상상한다면 나올만한 그림인 것이다. 소나기가 지나고 난 뜨거운 여름날, 나무숲 사이에 숨어있는 오두막 앞에는 맑은 여울이 흐르고, 물레방아 위로 졸졸 흐르는 물소리와 짐칸을 비우고 천천히 되돌아가는 건초마차의 덜거덕대는 바퀴 울림이 나른한 곳. 탁 트인 평원이 푸르고, 저 멀리 수확을 끝낸 농부들이 건초더미를 높이 쌓으며, 그 사이에 점점이 흩어져 풀을 뜯는 소들이 풍요로운 가을을 예고하는 곳. 시간조차 천천히 흐르는 듯한 이 동네는 컨스터블이 태어나 자라고, 평생토록 아끼고 사랑하며 화폭에 담았던 영국 서포크 지방의 스투어 강변이다. 이 작품은 1821년, 런던의 왕립 아카데미 전시에서 첫 선을 보였지만, 본국에서 보다 오히려 프랑스에서 더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잎사귀 하나하나가 눈부신 햇빛을 가득 받은 듯 선명하고 바삭바삭한 컨스터블의 초록색은 프랑스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색채의 대가로 알려진 들라크루아 조차 작업 중이던 [키오스섬의 학살]을 다시 채색할 정도였다. 컨스터블은 스튜디오 안에서 정해진 법칙에 따라 풍경을 그리는 당시의 전형적인 방식을 거부하고, 그리고자 하는 자연 속에서 직접 햇빛을 받고 공기를 느끼며 작품을 구상했다. 풍경화를 일생의 업으로 삼았던 그는 “어느 하루도 서로 같은 날이 없고, 단 한 시간도 서로 같은 시간이 없다. 세상이 창조된 이래 한 나무의 두 잎사귀도 같아 본 적이 없다. 진정한 미술이란 자연과 같이 서로 달라야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후,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과 대기의 색채에 민감했던 파리의 인상주의 화가들이 컨스터블에 열광했던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컨스터블은 “외국에서 부자로 사느니, 영국에서 가난하게 살겠다”고 선언할 만큼 영국 땅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2 빛과 대기의 색채를 정확히 잡아낸 놀라운 채색 그렇지만 사실 컨스터블은 영국이든 외국이든 어디서고 가난하게 살 팔자는 절대로 아니었다. 그의 부친, 골딩 컨스터블은 지금도 그 자리에 서있는 제분소, 플래포드 밀(Flatford Mill)을 소유한 그 지역의 유지이자, 상당히 부유한 곡물 상인이었다. [건초마차]는 플래포드 밀 앞에서, 한번도 집 밖으로 나와본 적이 없다는 이상한 이웃, 윌리 롯의 오두막을 바라본 풍경이다. 컨스터블이 그린 [골딩 컨스터블의 꽃밭]과 [골딩 컨스터블의 텃밭]은 화가의 위치만으로도 그의 부를 설명해주는 그림이다. 그는 말끔하게 정돈된 전원의 부유한 농촌을 내려다보는 아버지의 이층 저택에 서서 정원을 그렸다. [건초마차]는 물론이고, 이 두 작품에서도 배경이 된 땅은 모두 컨스터블 집안 소유였다. 컨스터블은 두 살 터울의 윌리엄 터너와 함께 영국의 풍경화를 대표하고 있지만, 터너와 비교하면 대기만성형이었다. 터너가 런던의 한미한 가정 출신으로 일찍이 직업화가가 되어 이름을 날렸던 반면, 컨스터블은 가업을 잇기 원했던 아버지의 반대를 이기느라 뒤늦게 본격적인 화가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터너가 영국 각지는 물론 유럽 대륙을 널리 여행하며 광대한 자연 앞에선 인간이 느끼는 압도적인 숭고함을 화폭에 담아 보는 이들의 전율을 이끌었다면, 컨스터블은 자칫 고리타분할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이 지속되는 시골 마을의 소박한 자연과 그 속의 오두막을 그리는 것에 만족했다. 컨스터블의 그림 속에는 늘 농부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은 결코 땅으로부터 두드러지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들은 자연 속에 파묻힌 채 성실하게 일하고, 자연은 인간의 노동에 보답하듯 풍요와 안정을 준다. 자연이 인간과 조화를 이루고, 그 속에서 질서와 안정이 유지되는 평온한 전원이 바로 컨스터블의 풍경화가 추구하는 이상향인 것이다. 따라서 과장되거나 지나치게 미화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풍경이 컨스터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스럽다고 해서 그것이 현실적이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3 좋았던 옛 추억에 대한 향수 어린 기억 컨스터블이 활동하던 즈음의 영국 농촌은 그림같이 아름다운 전원일 수 없었다. 영국은 프랑스와의 지루한 전쟁을 수년간 계속하고 있었고,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으로 영국은 크나큰 경제적 타격을 입으며, 산업 전반의 구조적인 개혁이 불가피하던 시점이다. 그 과정에서 농지에 부과된 과중한 세금과 농산물 가격 폭락이 맞물려 극빈층이 양산되고 농촌이 급격히 황폐화했다. 생계 조차 불안해진 소작농민들은 시골을 떠나 도시의 공장 노동자가 되거나, 사방에서 약탈과 방화를 일삼는 과격한 폭도들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결국 컨스터블의 풍경화가 보여주는 평온하고 풍요로운 농가, 그 속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농부들은 현실의 모습이 아니라, 좋았던 옛 추억에 대한 향수 어린 기억인 셈이다. 런던의 아카데미에 드나드는 관객들의 대부분은 도시에 생활 기반을 둔 중년의 보수적 중산층이었다. 그들은 컨스터블의 풍경화를 통해 현재의 불안에 잠시 눈을 감고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다. 컨스터블의 입장을 굳이 따지자면 지주의 아들이었던 그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컨스터블은 고향의 “물레방아에서 흘러나온 물 소리, 버드나무, 오래된 나무 등걸, 진흙 묻은 기둥과 벽돌담을 사랑한다”고 회고했다. 그는 바로 그 곳에서 어린 시절부터 함께 보내온 여인 마리아와 양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고 많은 자녀들을 기르며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리아가 일곱째 아이를 낳은 후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형언할 수 없이 깊은 슬픔에 빠진 화가는 그 이후로 검은 옷만 입고 지냈고, 남은 아이들을 홀로 돌봤다. 그는 “세상이 내게 얼굴을 바꾸었다”고 한탄했다. 그의 풍경화 또한 이전과 달리 어둡고 침울해졌다. 그가 사랑한 것은 결국 그 땅이 아니라, 그 땅에서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보낸 시간들이었던 것이다. 고향을 행복하게 추억하기 위해서 그 장소가 반드시 ‘꽃대궐’일 필요는 없다. 나도 사실은 한 뼘쯤 되는 화단을 빼고는 아스팔트 바닥뿐이었던 내 고향 ‘주공 아파트’를 종종 그리워한다. 지금은 그 모습이 흔적조차 사라지고 없지만, 그 동네가 그때 그대로라고 한들 어린 시절의 행복감이 되돌아올 리는 없다. 그래서 [고향의 봄] 또한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로 끝나는가 보다. 해시태그 #명화 #존컨스터블 #영국 #건초마차 #1821 #캔버스, Oil paint #내셔널 갤러리 존 컨스터블 작가 페이지 바로가기 작가 정보 출생년도 1767. 00. 00. 소개 터너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또 한 명의 영국 화가이자 프랑스 회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사람은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1776~1836)이다. 마이 컬렉션으로 추가 컬렉션 취소 확인 콘텐츠 신고 부적절한 사용자 혹은 콘텐츠 편파적 발언 또는 상징 나체 이미지 또는 음란물 지적 재산권 침해 기타 신고하기